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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누구든 '시인'입니다
이름 김선경
시인 신경림 님

“내게는 길만이 길이 아니며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을 통해 바깥 세상을 내다볼 수 있었고 또 바깥 세상으로 나왔다.”
평생 온 나라 안을 구름처럼 떠돌며, 어렵고 고단한 세월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의 신산한 이야기를 은은히 빛나는 보석 같은 언어로 기록해 온 '길 위의 시인' 신경림 님. 시인의 발길을 인사동 찻집 수희재(隨喜齋)에서 잠시 머물게 했다. 수희재, 낮은 구름이 드리운 유리창에 쓰여진 '더불어 기뻐하는 집'이란 글귀는, 시인의 탁탁한 목소리를 듣는 내내 시인은 저것을 위해 시를 써 온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했다.
“오늘의 시는 너무 크고 높은 것만 좇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자잘한 삶의 결, 삶의 얼룩은 다 놓치고…, 시의 값은 오히려 작고 하찮은 것, 못나고 힘없는 것들을 감싸안고 스스로 낮고 외로운 자리에 함께 서서 하나가 되는 데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을 틔운 시인의 작고 동그란 얼굴에선 옹달샘의 맑은 기운이 느껴졌다. 깊은 산속에서 저 홀로 깊어가며 숲의 생물에게 생명수를 주는 은혜로운 옹달샘.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시인은 동국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56년 <문학예술>에, 널리 알려진 시 <갈대> 등으로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왔다. 하지만 난해한 관념시가 주종을 이루던 당시 문단에 버거움을 느끼고, 그 뒤 10년 가까이 광산촌과 소읍을 온몸으로 뒹굴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을 모아 73년에 출판한 첫시집이 바로 <농무>이다. 이 시집은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 농민들의 가난한 삶을 노래하고 있지만,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 등 가난에서밖에 느낄 수 없는 쓸쓸한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
'시'는 시인만이 쓰는 특별한 기호처럼 여기던 그때,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읽을 수 있는 편안한 말로 쓰여진 그의 시는 '천상의 시가 땅으로 내려왔다'는 찬사를 들으며 문단에 큰 충격과 감동을 안겨 주었다.
그 뒤 시인은 4~5년에 한 번 꼴로 성실하게 시집을 펴내, 질박한 그의 삶의 기행은 <새재>, <달 넘세>, <가난한 사랑 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지난 98년 출간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으로 이어진다. 노랫가락처럼 신명나는 그의 시어와 때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과 웅숭깊은 지혜를 한결같이 담고서.
오랜 세월 오롯이 시의 길만 걸어 왔으니 시의 길을 웬만큼 터득했을 거라 여기며 우문을 던지자 시인은, “시인이란 오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하면서도 시어 한 마디엔 열 마디의 뜻을 담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시인의 단순한 자질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깊고 또 깊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하고 옳게 고쳐 주었다.
시인의 나이 예순넷, 시인의 넓은 등뒤에는 어느덧 엷은 노을이 비추기 시작했다. 누구나 지나온 세월을 한 번쯤 돌아볼 이즈음, 시인은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한 게 못내 후회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시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시'이고 보면, 그의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과 용기, 지혜가 되어 왔음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전하여 인간성이 타락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우리가 막연히 불안해하는 어떤 사회로 치달아갈지도 모르지만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렇지 않게 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저는 다가올 미래도 그런 긍정적인 힘이 지켜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생활인으로서의 어려운 세월을 살아오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돈을 많이 안 쓰니까 조금 벌어도 된다”며 조그맣게 웃는 시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과 '한없이 낮추고 가난해지려는 마음', 밝아오는 새 천년 우리의 가슴에 품고 가야할 것은 바로 시인의 이러한 눈빛과 마음이 아닐까. 새 천년의 희망은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내달에 시인은 그 간의 삶을 정리한 자서전을 펴내고, 2~3년 뒤쯤 여덟번 째 시집을 펴낼 생각이다.
“나는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을 위해 시를 썼습니다. 내게 있어 시란 내가 살아온 이야기일 뿐이지요. 그리고 사람이 살았으면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현재를 사는 사람이나 훗날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끝으로 우리 시대 어른으로서 젊은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청하자, 시인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세요” 했다. 지극히 평범한 말이지만 언제나 작은 원칙을 지키지 못해 삶을 망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 입히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떠올려 보면, 생을 꿰뚫거나 많이 살아본 사람만이 그 참뜻을 아는 충고가 아닐런지.
또 다시 어디론가 발길을 옮기는 시인. 하늘은 잿빛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모든 것을 사랑의 눈으로 똑같이 내려다보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눈이 되어 금방이라도 온 세상에 공평하게 펑펑 내릴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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